‘죽은 경제’ 이론이란 무엇인가
MIT 경제학자 Daron Acemoglu가 제기한 ‘죽은 경제(Dead Economy)’ 시나리오의 핵심은 단순하다. AI 자동화가 노동을 보완하지 않고 대체하는 방향으로 치우칠 때, 생산성은 제자리를 맴도는 반면 노동 소득은 줄고 소비 수요도 함께 쪼그라든다는 것이다. 기술이 발전해도 경제 전체가 활기를 잃는 역설적 경로다.
기술 낙관론과 ‘죽은 경제’ 비관론이 갈리는 지점은 하나다. 보완 기술이 함께 창출되느냐, 아니냐. 증기기관이 철도·금융·도시 인프라라는 보완 산업을 폭발시킨 것처럼, AI도 새로운 역할과 업무를 동시에 만들어야 낙관론이 성립한다. 하지만 Acemoglu의 판단은 다르다. 현재 AI 투자의 상당 부분이 비용 절감형 대체 자동화에 쏠려 있어, 신규 수요를 창출하는 속도보다 기존 노동을 없애는 속도가 빠르다는 것이다.
2025~2026년 이 이론이 다시 주목받는 이유는 분명하다. 글로벌 AI 투자 규모는 수천억 달러 수준으로 전례 없이 커졌지만, 각국의 노동생산성·총요소생산성(TFP) 지표는 뚜렷한 반등 없이 정체 중이다. 돈은 쏟아붓는데 숫자가 움직이지 않는다.
생산성 역설: AI 투자는 늘었는데 숫자가 움직이지 않는 이유
NBER이 2026년 2월 발표한 조사는 이 역설을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미국·영국·독일·호주 기업 임원 약 6,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 90%가 AI가 최근 3년간 고용이나 생산성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응답했다. 규모도, 업종도, 국가도 다른 임원들이 이렇게 일관된 답을 내놓는다는 건 통계적 잡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이 패턴에는 이름이 있다. 1980년대 로버트 솔로가 지적한 ‘IT 생산성 역설’의 재판이다. 당시에도 컴퓨터 투자가 급증했지만 생산성 통계는 10년 넘게 반응하지 않았다. 낙관론자들은 지금도 같은 논리를 꺼낸다. 기술 확산에는 시간차가 있고, 조직 문화와 업무 프로세스가 기술에 적응하는 데 10~20년이 걸린다고. 이 ‘시간차 가설’은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구조적 한계 가설도 무시하기 어렵다. AI가 보조하는 업무의 생산성은 올라가되, 그 이익이 소수 기업과 자본 소유자에게만 귀속돼 거시 지표에 반영되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이행기 비용 문제도 있다. 기업이 AI 시스템 도입·통합·재교육에 지출하는 비용은 즉각 손익계산서에 반영되지만, 생산성 개선 효과는 수년 후에야 나타난다. 단기 재무제표만 보면 AI 투자가 오히려 수익성을 갉아먹는 것처럼 보인다. 측정 문제도 빠지지 않는다. GDP나 TFP는 소프트웨어 품질 향상, 오류 감소, 의사결정 속도 개선 같은 디지털 생산성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 반론 역시 한계가 있다. 측정이 아무리 불완전해도 어딘가에서 소득 증가나 고용 확대로 나타나야 하는데, 그 흔적이 너무 희미하다.
낙관론 데이터를 제대로 읽는 법
WEF 미래 일자리 보고서 2025는 자주 낙관론의 근거로 인용된다. 2030년까지 AI로 9,200만 개 일자리가 대체되고 1억 7,000만 개가 새로 생겨 순증 7,800만 개라는 숫자다. 그러나 이 숫자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건 위험하다. 대체되는 9,200만 개는 현재 존재하는 구체적 직무이고, 신규 창출 1억 7,000만 개는 조건부 시나리오다. 그 조건이 바로 재교육 속도, 보완 기술 투자, 분배 정책의 동시 작동이다. 세 가지 중 하나라도 빠지면 순증 시나리오는 성립하지 않는다.
한국고용정보원이 2026년 5월 18일 발표한 ‘2025~2035 정성적 일자리 전망’도 맥락 없이 읽으면 오해를 부른다. 분석 대상 205개 직업 중 93.4%인 191개가 향후 10년간 일자리를 유지하거나 늘어날 것으로 전망됐고, 감소 전망은 12개(6.6%)에 그쳤다. 언뜻 매우 안심되는 수치다. 그러나 이 보고서는 직업의 ‘소멸’보다 ‘직무 내용의 변화’를 전망한다. 일자리 수는 유지되어도 해당 직업 안에서 담당하는 업무 40~60%가 AI로 재편될 수 있다. 자리는 있지만 하는 일이 달라진다는 뜻이다. 유지·증가 전망을 단순히 ‘안전하다’로 읽으면 준비 자체를 놓친다.
‘죽은 경제’를 만드는 구조적 고리
왜 기업은 보완 기술보다 비용 절감형 자동화를 선택할까. 답은 인센티브 구조에 있다. 단기 주주 이익을 극대화해야 하는 상장 기업에게 인건비 삭감은 즉각적이고 측정 가능한 성과다. 반면 보완 기술 투자는 장기적이고 불확실하다. 이 비대칭성이 자동화 편향을 구조적으로 강화한다.
자동화 이익이 자본 소유자와 고숙련 노동자에게 집중될수록 중산층 소비 기반이 좁아진다. 소비가 줄면 기업 매출도 준다. 기업은 다시 비용 절감을 위해 자동화를 강화한다. 이것이 Acemoglu가 우려하는 수요 위축의 자기강화 고리다. AI가 이 고리를 끊으려면 생산성 이익이 임금과 고용으로 환류해야 하는데, 지금의 분배 구조는 그 반대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다.
AI 독점화 문제도 같은 맥락이다. 최첨단 AI 인프라는 빅테크 몇 곳에 집중돼 있다. 중소기업이 동일한 생산성 혜택을 얻으려면 이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고, 그 비용과 진입 장벽이 만만치 않다. 한국은 Stanford HAI 2026 AI 지수에서 인구 대비 AI 특허 출원 수 세계 1위를 기록했다. 그러나 특허 출원이 일선 중소기업의 실질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지는 경로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출원 집중과 활용 분산은 별개의 문제다.
한국 맥락: AI 기본법 시행과 생산성 격차
2026년 1월 22일 시행된 「인공지능 발전과 신뢰 기반 조성 등에 관한 기본법」은 AI 서비스 제공 시 이용자 사전 고지와 생성물 워터마크 표시를 의무화하고, 위반 시 최대 과태료 3,000만 원을 규정했다. 규제 자체는 소비자 신뢰 구축 측면에서 타당하다. 문제는 적용 부담이 대기업보다 중소기업에 더 무겁게 작용한다는 점이다. 법무·기술 대응 역량이 부족한 스타트업과 중소기업은 AI 서비스 출시 자체를 주저할 수 있다.
한국형 ‘죽은 경제’ 시나리오는 이렇게 구성된다. 특허 출원은 세계 1위지만 실제 기업 적용률은 대기업 중심으로 편중돼 있고, 규제 순응 비용은 중소기업에 집중되며, AI 자동화 이익은 소수 플랫폼 기업으로 쏠린다. 이 구조가 고착되면 총량 지표는 나쁘지 않더라도 생산성 격차는 오히려 심화된다.
규제가 혁신을 막는다는 주장과 신뢰 기반을 만든다는 주장 모두 일리가 있다. 다만 실증적으로 볼 때, 규제가 혁신을 순억제한 사례는 진입 장벽이 높고 순응 비용이 비대칭적일 때 주로 나타난다. 지금 AI 기본법이 바로 그 조건에 해당하는지 주시할 필요가 있다.
실질 대응 전략: 지금 할 수 있는 것
이론의 타당성을 파악했다면, 다음 질문은 간단하다. 지금 무엇을 할 것인가.
개인 수준에서 가장 효과적인 방향은 AI가 대체하기 어려운 역량에 집중하는 것이다. 여기서 ‘창의성’이나 ‘소통 능력’ 같은 추상어는 쓸모가 없다. 구체적으로는 세 가지다. 첫째, 맥락 판단—불완전한 정보 속에서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능력. AI는 주어진 데이터로 최적화하지만, 어떤 데이터를 무시할지 결정하는 건 여전히 사람의 영역이다. 둘째, 관계 설계—신뢰와 협업 구조를 만드는 능력. 고객·동료·파트너와의 장기적 신뢰 관계는 자동화 대상이 아니다. 셋째, 창의 조합—서로 다른 도메인의 지식을 이어붙여 새로운 프레임을 만드는 능력. AI는 학습 데이터 내 패턴을 따르지만, 경계를 넘는 조합은 여전히 인간이 유리하다. 이 세 역량은 현재 직무 안에서 의도적으로 연습할 수 있다. 보고서를 AI에 맡기고 남은 시간에 판단·관계·조합 업무를 늘리는 방식으로.
조직 수준에서는 자동화 비용 절감분의 재투자 방향이 핵심이다. 인건비 절감으로 확보한 예산을 주주 환원이나 단기 비용 삭감에만 쓰면 ‘죽은 경제’ 고리에 기여하는 셈이다. 절감분의 일정 비율을 종업원 재교육, 신사업 실험, 보완 기술 인프라에 투자하는 내부 규칙을 만드는 게 현실적이다. 수치를 정해두는 것이 중요하다. “여유가 되면 한다”는 결국 안 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정책 수용자 관점에서는 AI 기본법과 재교육 지원 제도를 전략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중소기업의 경우 AI 기본법 준수를 위한 정부 컨설팅 지원이나 표준 가이드라인을 먼저 확보하면 순응 비용을 줄일 수 있다. 개인이라면 고용부·산업부 산하 AI 재교육 프로그램의 지원 조건과 일정을 지금부터 모니터링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제도가 정비되기를 기다리다 뒤늦게 합류하면 경쟁이 치열해진다.
불확실성이 크다는 이유로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은 최악의 선택이다. 시나리오 기반으로 움직이는 게 낫다. 낙관 시나리오(보완 기술 창출, 재교육 성공)와 비관 시나리오(자동화 편향 고착, 소득 집중) 중 어느 쪽이 실현되어도 손해가 적은 포지션을 지금 잡는 것이다. 두 시나리오 모두에서 가치 있는 역량과 역할에 지금 투자하는 것—그것이 이론의 타당성 여부와 무관하게 합리적인 대응이다.
자주 묻는 질문
Q. ‘죽은 경제’ 이론은 AI 자체를 반대하는 러다이트 주장인가?
그렇지 않다. Acemoglu 본인도 AI의 잠재력을 인정한다. 그가 지적하는 건 기술의 존재가 아니라 현재의 투자 방향과 분배 구조다. AI가 보완 기술과 함께 발전하고 이익이 광범위하게 분산된다면 낙관론이 실현된다. ‘죽은 경제’ 경고는 그 조건이 저절로 충족되지 않는다는 주장이지, AI 자체에 대한 반대가 아니다.
Q. NBER의 ‘영향 없음’ 응답 90%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두 가지 해석이 공존한다. 하나는 AI 효과가 아직 측정 가능한 형태로 발현되지 않았다는 것(시간차 가설). 다른 하나는 기업들이 AI를 실제로 생산성 향상에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구조적 한계 가설). 90%라는 숫자 자체는 ‘AI 붐이 실물에 반영됐다’는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낙관론자든 비관론자든 이 데이터를 무시하기는 어렵다.
Q. 한국고용정보원 93.4% 유지·증가 전망은 안심해도 된다는 뜻인가?
일자리 수 유지와 업무 내용 유지는 다르다. 직업이 사라지지 않더라도 그 직업 안에서 수행하는 작업의 상당 부분이 AI로 대체되거나 변형될 수 있다. 93.4%를 ‘내 자리는 안전하다’로 읽으면 오히려 준비를 늦추는 함정이 된다. ‘자리는 유지되지만 하는 일이 달라진다’는 전제로 지금부터 업무 역량을 재점검하는 것이 맞다.